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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9 ] 유배시킨 상처는 반드시 되살아난다
BACK-UP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시고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바빠도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 단 1초의 공백만 있어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마음을 흔드는 사람. 그런 사람은 둘중 하나다. 정말 사랑했거나 나에게 용서 못할 큰 상처를 주었거나. 아니면 둘 다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우리는 갑자기 들이닥친 상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른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매달릴까, 정을 뗄 수 있게 더 큰 상처를 달라고 할까, 아니면 평생 그가 괴로워할 만한 복수를 할까.
이도저도 내키지 않을 때 혼자 남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마음속에서 그를 죽이는 일이다. "나를 버린 '나쁜 놈'과는 더 이상 어떤 관계도 갖지 않겠다. 그는 나에게 죽은 사람이다. 만난적도, 사랑한 적도 업었던 사람이다."
우리는 이렇게 상대와의 관계를 단절해 버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냉정해짐으로써 상처에서도 멀어지려고 한다. 그리고 그 나쁜 놈을 쓸모없는 물건처럼 창고에 처박아 두고, 완전히 그를 무시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그는 잠시 밀려난 것일 뿐,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의 이름을 듣거나 함께 듣던 음악이 들려올 때, 그와 닮은 사람을 마주쳤을 때, 그 사람에게 가졌던 실망감, 배신감, 거부감 같은 부정적 감정들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온다. 그 고통이 너무 커서 우리는 다시 몸부림치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가 한 짓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제, 그가 얼마나 차갑고 매정한 사람인지 욕을 하고, 마치 어제 버림받은 사람처럼 격렬하게 울부짖는다. 그때 해야 했으나 직접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말이다.



유배시킨 상처는 반드시 되살아난다.

유배시킨 상처가 얼마나 많은 정신적인 에너지를 빼앗는지는, 마음속 창고에 쳐박아 두었던 옛 연인을 만났을 때 활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는 내가 다른 연애를 시작하고 갈등을 겪을 때마다 홀연히 나타나 새로운 연인의 옆에 앉았다. 나는 두 사람과 싸워야 했고 두 배로 큰 상처를 극복해야 했다.
옛 연인과 그랬던 것처럼 지금 만나는 사람과도 결국 헤어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든 어느날, 나는 지하실에서 처박아 둔 상처를 내쫓기로 결심했다. 나는 이유없이 떠나가 버렸던 그 사람을 다시 만났다. 물론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여전히 내가 그를 사랑하고 못 잊고 있다는 뜻으로 비춰질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고 구차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현재의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그를 만나야 했다.
우리는 30분쯤 만났다. 그를 원망하거나 내가 얼마나 마음을 다쳤었는지 알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때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는 말이 없었고, 어찌 다 털어놓는 얘기도 속 시원한 대답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의 입장을 들어보려는 시도만으로 단단한 마음의 빗장이 조금씩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갈등이 해결된 것도, 상처의 본질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지만 내 마음은 훨씬 홀가분해졌다. 창고에 유배됐던 그와 악수를 나누고 정식으로 이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솔직히 나의 진짜 마음은 그의 변명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저 여전히 나를 상처 입히는, 터뜨리지 못한 화를 쏟아내서 그에게도 똑같은 고통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만나고 다시금 분노와 억울함, 고통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지?'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를 원망하고 화를 내서 나와 똑같이 상처 입히면 정말 속이 후련해질까? 아니었다. 백만 번 생각해도 대답은 '아니다'였다.
처음 유배된 상처는 그에게 받은 거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그 상처를 키우고 곪게 한 건 나의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그가 땅에 묻힌다 해도 사라지지 않을, 오직 나만 해결할 수 있는 슬픔이었던 것이다.
연애 기간 동안 우리는 수 십 번 소리를 지르며 끝장을 낼 듯 다퉜고, 친구들을 통해 상대에게 바라는 것들을 전달해왔다. 나는 그가 나의 어떤 점을 싫어하는지, 뭐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관심받고 싶어서, 때로는 정말 그를 괴롭히고 싶어서 고치지 않았다. 유배된 상처에는 그가 나에게 준 상처뿐만 아니라 끝까지 나를 받아주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 자존심, 그리고 미안함까지 담겨 있었다.



( 배르벨 바르데츠키,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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